휴거와 재림

교회의 휴거

요한 계시록이 시작되면 일곱 교회가 등장하고, 계시록 4장 1절에서는 바로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이 열리며 올라오라는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바라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더라. 내가 들은 첫 번째 음성 곧 나팔 소리같이 내게 이야기하던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계 4:1)

하늘은 주님이 강림하실 때에만 열리며 계시록에서 두 번만 있습니다. 4장 1절과 19장 11절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한 번, 지상으로 한 번 오심을 알 수 있습니다. 4장 2절에는 요한이 즉시로 영 안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하늘의 왕좌와 거기 앉으신 분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그대로 보면 요한은 순식간에 변화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은 휴거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하늘이 열림.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 올라오라 부름.
-몸이 변화됨.
-하늘로 올라가 이후로 주님과 함께함.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한 신비와 일치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 15:51~54)

이처럼 '성취되리라' 한 것이 성취되는 장면이 계시록 4장의 도입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의 휴거를 뜻하는 것입니다.

휴거의 실재성과 그 소망

먼저 휴거가 정말 있는지에 대해 잠깐 살펴봅니다. '휴거'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들림을 받는다'는 표현이 있고, 성경에서 사람이 들려 올라간 사례는 예수님 이외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에녹(창 5:21~24),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라간 엘리야도 있습니다(왕하 2:11). 또 사도행전의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사막에서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뒤 갑자기 사라지는데, 하나님의 손에 채어 가서 아소도 지방에 나타나게 됩니다(행 8:39). 바울도 셋째 하늘에 채여 올라갔었습니다(고후 12:2, 4).

랩처(Rapture), 즉 휴거는 라틴어 rapere가 어원인데, 이 말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그리스어(헬라어) 하르파즈(harpaz)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 caught up(채여 올라가다)입니다. 성도들의 휴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의 기록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비중으로 효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똑같이 주님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라.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 (렘 32:27)

또한 바울이 말한 신비는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를 이룬 성도들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모든 역사 속의 성도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들이 아니고 그들 모두는 이런 날을 기다리며 우리처럼 살다가 먼저 간 지체였습니다. 다만 우리 시대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때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께서 어느 때로 계획하셨든지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입니다.

1993년 휴거를 주장한 이들의 해프닝 때문에 한국 교회는 휴거와 종말론 자체를 금기시해왔습니다. 마치 휴거를 말하기만 해도 이단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귀의 영리함에 모두가 속은 것입니다. 이제 모든 교회는 이 땅에서의 축복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휴거가 분명히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성도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시기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뿐이지요.

성도들은 휴거가 되기 때문에 이런 환난의 내용들을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거나 공포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휴거되지 못하고 남을 사람들에게 무서운 환난이 임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복되고 소망어린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휴거의 소망을 가졌습니까? 막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정말 날짜를 세며 간절히 기다리십니까? 이런 소망은 지치고 힘든 삶에서의 해방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현실도피적 휴거를 꿈꾸는 것은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할 날을 꿈꿔야 합니다. 그때는 정말 즐겁고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이며 몸도 변화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날 때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실 주님을 생각하면, 그날의 일들이 정말 기대됩니다. 우리는 동명이인도 있겠지만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와 함께 나팔소리를 분명히 알아들을 것입니다. 주어진 날들을 성실히 살되 주님을 바라보며 두려움 없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성경의 기적들을 대할 때 우리의 일반적인 눈으로만 보려고 하면 이해하기가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 다른 차원에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대기권만 벗어나도 숨조차 쉴 수 없는 존재지요. 하나님은 모든 물질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을 무에서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은 그분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2차원 운동만 하는 지렁이 같은 동물은 입체적인 시각이나 개념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입체적 공간에서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다람쥐가 신기합니다. 또 바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요. 또 먹이를 들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렁이에게는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차원은 지렁이와 다람쥐간의 간격보다 훨씬 더 큽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같은 것도 그분께는 너무나 손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적들보다 더 신기한 말씀의 정확함을 보았습니다. 도무지 뀌어 맞추려고 해도 맞을 수 없는 고대의 수천 년에 걸쳐 기록된 말씀들이 정확히 짝이 있고 그대로 이루어지며 성경 안에서 논리적으로 뒤틀림이 없다는 기적적인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올리시고, 또 셋째 하늘에 다다를 수 있는 몸으로 홀연히 변화시키실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흥분되지 않습니까. 그때는 땅의 모든 일에서 우리가 놓임을 받을 것입니다.

휴거는 우선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옵니다. 장차 있을 일들을 알려주는 소망의 내용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지, 또 살아서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보게 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3~18)

휴거의 시기 (1): 환란전 휴거설

질문: 휴거가 일어나는 시점은 언제인가? (환난전, 진노전, 환난중, 환난후)

답변: 환난과 관련해서 휴거의 시점이 언제인지를 말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많은 논쟁 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휴거 시점에 대한 세가지 주요 견해는
(1)환난전휴거(휴거가 환난 전에 일어남),
(2)환난중휴거(휴거가 환난의 중에 또는 중간 즈음에 일어남),
(3)그리고 환난후휴거(휴거가 7년 대환난이 끝날 때 일어남)입니다.
(4)일반적으로 “진노전휴거”로 알려진 네 번째 견해는 환난중휴거 견해를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첫째, 환난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니엘 9장 27절에 의하면, 아직 다가올 일흔 번째 이레(7년)가 존재합니다. 칠십 이레(단 9:20-27)에 대한 다니엘의 전체적인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히 이스라엘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기간입니다. 환난의 기간인 칠십 번째 이레(7년) 역시 하나님께서 특히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시간이 틀림 없습니다. 이것이 꼭 교회가 환난 중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기간 동안에 왜 교회가 이 땅에 있어야 하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휴거에 대한 주요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입니다. 이 구절들은 살아 있는 모든 신자들이 죽었던 모든 신자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을 말합니다. 휴거는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부터 그분의 백성을 옮기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몇 구절 뒤인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환난 기간을 주로 다루는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환난 기간 중에 그분의 진노를 이 땅에 쏟아 부으실 것인지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은 주의 진노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면서 그들이 환난의 진노를 겪도록 이 땅에 남겨두신다면 이는 모순되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옮기시겠다고 약속하신 후에 곧바로 진노로부터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라면 환난과 휴거 사건은 서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휴거의 시기에 대한 또 다른 주요 구절은 요한계시록 3장 10절인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 위에 임하게 될 “시험의 때”로부터 신자들을 구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의 기간 중에 믿는 자들을 보호하시든지, 아니면 시험에서 신자를 빼내어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 “부터”로 번역된 헬라어의 유효한 의미들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무엇으로부터 보호 받기로 약속 받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단지 시험으로부터가 아닌, 시험의 ‘시간’으로부터 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을 포함하는 바로 그 시간으로부터, 다시 말해, 환난으로부터 신자들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환난의 목적, 휴거의 목적,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의 의미,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 10절의 해석 모두가 환난전휴거의 견해를 분명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문자 그대로 일관성 있게 해석된다면, 환난전휴거의 견해가 가장 성경에 근거한 해석입니다.

7년 환난이 닥친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이는 다니엘의 70이레를 통해서도 마지막 남은 한 이레, 즉 7년을 두고 현재 공백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백기가 있는 이유는 아무도 마지막 날을 점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자 계획입니다.

휴거는 환난 전이나 후냐, 중간이냐, 여러 차례냐, 혹은 아예 없느냐 등 학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면 전 세계적 환난은 휴거 이후, 즉 환난전 휴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휴거는 환난 전이며 한 번 뿐입니다. 또한 재림은 공중재림(휴거)과 지상재림으로 각각 7년 대환난의 시작과 끝 부분에 일어납니다.

대환난에 이스라엘이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모두가 동의합니다. 그들과 화평의 조약을 맺는 세력이 환난의 한 중간에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 성경의 수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교회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메시아를 죽인 자들이며 아직 하나님께 되돌아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반면에 교회, 즉 성도는 '한 처녀'로 성도 전체가 '한 몸'입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상태로 이미 주님과 혼인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정혼만 한 상태임에도 주의 천사가 요셉에게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한 처녀로 주님과 정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과 이미 한 몸입니다. 자신의 몸에 진노를 쏟아 붓는 주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지옥과 같은 대환난에는 성도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환난 후 휴거나 환난 중간 휴거는 맞지 않습니다.

대환난 후에 있을 예수님의 지상 재림을 휴거로 보고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지상 재림은 성도를 데리러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올라가 7년간의 혼인잔치를 마친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 (골 3:4)

휴거는 다음과 같이 나팔소리와 함께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4~16)

휴거는 지상 재림이 아니라 공중 재림입니다.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환난 후 휴거에 관한 논리는, 이 중대한 마지막의 역사에서 참 성도와 가짜를 어떻게 구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고 믿음을 보여야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데, 이는 복음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인데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가 육체적 고난을 견뎌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주님을 배반했던 이스라엘은 그런 과정을 거쳐 믿음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거부하다가 뒤늦게 깨달아 환난에 들어간 자들도 목숨을 내놓기까지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을 지니고는 짐승의 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건져냄을 받아 안전히 거하는 존재입니다.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 주나니 이분은 곧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신(delivered) 예수님이시니라. (살전 1:10)

분명히 장차 다가올 일을 말씀하면서도 과거형으로 '건져 내신'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이미 건져 내신 것이 아니라 진노가 있을 때, 즉 진노에 들어가서 건져 주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NIV도 현재형 삼인칭 동사 rescues(구조하다)를 씁니다. 이런 단어 하나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 (롬 5: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 (살전 5:9)
이 말씀들 역시 우리가 대환난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진노(wrath)라는 단어는 유대인들이 마지막에 받을 고난의 날인 '주의 날'에 해당합니다.

특정한 말씀들을 잘못 해석해 환난 후 휴거가 주장되기도 하는데, 다음 말씀도 환난 통과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I also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계 3:10)

이 부분의 '시험의 기간을 면한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험에 들어가긴 들어가는데 거기서 견딜 수 있게, 혹은 보호를 해준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keep from~는 '~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의 숙어가 아니라 '~하지 못하게 하다, ~에 들어가지 않게 하다'라는 의미로, 아주 기초적인 숙어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어가되 지켜준다는 것은 자기들의 교리에 맞춘,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성도는 '면제'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지옥 같은 곳에 넣어 함께 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이 임할 때도 하나님은 의인들이 적으니 연대책임으로 함께 죽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피신시킨 후에 멸망시키십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됐지만 그녀도 구원을 받은 후에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이 멸망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롯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 대해서도 너를 받아들였은즉 네가 말하는 이 도시를 멸하지 아니하리니 너는 속히 거기(소알 땅)로 도피하라. 네가 거기에 이르기까지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도시의 이름을 소알이라 하였더라. (창 19:21~22)

너무나 명백한 말씀이고 하나님의 방식이 상식적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라고 해서 다른 계산법을 적용하시지는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휴거의 시기 (2): 환란후 휴거설 (이재하목사)

계시록 7:9-17이 휴거시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앞에서 나오는 144K는 이방인이며 계시록 7장의 사람들은이들은 이방인 각나라와 족속과 백성)이다. 이기는 자에 대하여 중간휴거설 주의자는 소환란을 이겼다는 잘목된 주장이며, 환란후 휴거설 주의자는 큰 환란에서 나온자(과거동사에 대한 분사: 에르코메노이)라는 자라고 제대로 해석한다.

계시록 3:10, 환란전휴거로 등장시키는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하여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라고 했습니다. 세대주의자들은 2가지를 기본으로 한다. 계시록 4장에 이리로 올라오라는 교회에 해당된다고 한다. 3:10, 시험을 때를 환란의 때라 보고 이를 면하여 준다고 보고 있다. 시험의 때를 환란으로 볼수 있는가? 영어표현을 보면 I will also keep you from the hour of trial 이다. 이것이 (1)시험에 때에 들어가지 않게한다는 것이냐? (2)또는 시험에 때에 내내 돌보아준다는 뜻이냐?
•희랍어로 '페레소에크"라는 의미는 어떤 상태가 있었다는 전제하는 이동의 전치사 이다. 그러므로 시험의 때를 통과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가 맞는다. 에크라는 전치사를 커다란 논란을 갖는다. 시험의 때에 너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해석이 맞는다. 그리고 한국어 본문의 "면하게 한다"는 표현이 없다. 영어만 가지고도 안되며 희랍어로 해석해야한다. 환란후 휴거설이 맞는다. 희랍어를 알아야 한다. Biblical Academy 에서 희랍어를 할수 있다.
•또한 시험의 때가 (1)로마시대냐? (2)대환란이냐? 과거적해석이냐 미래적해석이냐? 시험이 희랍어로 "호라 투 페이라무"란 그 시험의 그때라는 특별한 환란의 때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를 말한다. 그 시험의 때, 대환란의 때라고 말해야 한다.
•땅에 거하는(에피..) 자들이란 항상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가나안인들 땅의 거류인들과 같은 의미이다. 요한계시록은 히브리적 사고방식의 희랍어로 씌여져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설교하기에는 적합하다.

휴거와 7년 환난 시기의 인류 구분

 휴거와 7년 환난 시기에 있을 일들을 맞이할 대상은 다음 도표에서 보듯이 세 가지 유형의 인간밖에는 없습니다. 교회, 즉 성도는 7년 환난과 상관없이 휴거되며, 유대인과 불신자는 환난에 들어가는데,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 누구도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구분

교회

유대인

불신자

자격

구원받은 예수님의 지체로

그분과 정혼한 한 처녀

메시아를 거부해

구원받지 못한 하나님의 아내

믿지 않는 모든 자,

멸망할 자들

구성원

믿기만 하면 구분 없음

유대인

이방인

휴거

대환난 전 휴거됨

환난 통과

구원

이미 구원받음

환난 중 순교의 각오로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영접해야 함

휴거가 없이 7년 환난을 모두 통과한 후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7년이 끝난 후에 휴거가 있게 되면 교회와 유대인과 이방인 환난 성도가 모두 지상에서 사라집니다. 불신자들은 물론 심판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면 천년왕국에 살아서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일단 변화되고 휴거되면 더 이상 아기를 낳지 않는 영화로운 몸이 되기 때문에 천년왕국에 관한 다음 말씀들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수가 많지 않은 어린 아기나 자기의 날들을 채우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거기에 없으리니 아이가 백 세에 죽으리라. 그러나 죄인은 백 세가 되어도 저주받은 자가 되리라. (사 65:20)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사 11:8)

이처럼 천년왕국에는 육체를 지닌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휴거가 미리 있지 않고 7년 후에 다같이 올라간다면 이런 성경의 예언들을 충족시킬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휴거와 재림을 혼동하면...
대개 휴거의 여부와 회수, 시기 등의 혼란을 겪는 것은 유대인과 성도의 구분을 잘 못하는 등의 이유도 있지만, 휴거와 재림 등을 이르는 문맥을 뒤섞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휴거와 재림은 명백히 다릅니다. 한 예로 휴거(공중재림)는 성도들이 지구상에서 구출되어 사라지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지상재림은 불신자들이 심판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사건입니다. 이때는 지구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구출되는 것이므로 완전히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날들에 이루어진 것 같이 사람의 아들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6)

노아의 날들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데려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자를 지구상에서 제거하시고 노아와 그 가족들을 땅에 남기셨습니다. 노아의 날들과 같이 마지막 재림 때에도 불신자들은 땅에서 제거됩니다. 그리고 믿고 견딘 자들은 남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가며 낙원이 회복된 땅에서 계속 삶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때가 '노아의 날들'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휴거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6~17)

분명히 우리 성도들이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주님을 만난다고 했습니다.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의 두 문맥이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휴거가 대환난 후에 한 번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가 올라가면 천년왕국에는 대체 누가 들어가는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휴거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 (빌 1:6)

반면에 지상재림은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며 '야곱(이스라엘)의 고난의 때'입니다.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욜 2:31)

휴거와 재림의 차이 비교

이처럼 휴거와 재림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은 휴거와 재림이 단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간 휴거 등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들이 맞는다면 휴거나 재림은 모두 같은 특성을 지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휴거

재림

'그리스도의 날'이라 부름(빌 1:6)

'주의 날'이라 부름(욜 2:31 등)

성도가 사라짐

불신자가 사라짐

소망 중에 기다림(딛 2:13)

모두가 애곡함(마 24:30)

공중으로 오심(요 14:3, 살전 4:17)

땅으로 오심(슥 14:4, 욥 19:25)

비밀리에 이루어짐(고전 15:51)

공개적으로 이루어짐(계 1:7, 마 24:27)

주님이 직접 오심(살전 4:16)

천사들을 먼저 보내 이스라엘을 모으심(마 24:31)

아무 징조도 없음.

많은 징조와 표적이 있음(눅 21:11, 21:25~27 등)

신약 교회 성도들의 부활.

환난 성도와 구약 성도의 부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됨(빌 3:20~21 등)

몸이 변화된다는 말씀이 없음.

복된 소망임(딛 2:13, 살전 4:17~18)

성도에게는 두려움, 불신자에게는 경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심(살전 1:10)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부으심(계 19:15)

구원받은 자들을 모으심(살전 4:16~17)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모으심(마 13:41~42)

7년 환난의 신호탄

7년 환난의 마무리

그러므로 휴거와 재림, 즉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은 완전히 다른 사건입니다. 휴거, 즉 공중재림이 없이 단 한 번의 지상재림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분명히 드러난 공중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미미하기 때문에 무시하곤 하지만, 공중재림의 내용이 비교적 적고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게 표현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와 정혼한 한 처녀인 신부, 즉 성도들과 우리 주님과의 비밀스러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 성도들과 하늘에서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시는데, 그동안 우리들도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휴거의 시기와 대상, 재림의 시기와 대상을 잘 알면 앞으로의 일이 계획표처럼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 대상인지, 내 가족과 이웃이 어떤 상태인지 그림이 그려지고, 해야 할 일이나 마음의 상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안전-소망-대비-전도-선포 등의 순서로 자신을 돌아본다면 불필요하게 종말론에 시간을 쏟느라 죽어가는 이들을 건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소망 중에 주님의 오심을 사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2027

환란통과설 반박: 이리로 올라오라 (이송오목사)

진리의 지식을 바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잘못 쓰여 진 책이다.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순진하기에 그 책의 내용이 성경적 진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받아들이게 되는데, 여기에 문제와 함정이 있다. 한번 그것을 지식으로 흡수한 사람은 그것이 틀린 것인 줄 모른다. 따라서 그 후에 올바른 지식이 제시되어도 자신의 잘못된 지식 때문에 올바른 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성경을 배우려고 했던 처음의 순수한 열정은 이렇게 해서 훼손당하고 만다.

누룩을 퍼뜨리는 것은 사탄이 하는 짓이며 우리 주위에는 그런 거짓 교리들이 만연되어 있다. 특히 종말론은 더욱 혼미하다. 처음에는 잘 설명하는가 싶지만 계시록 4장 1절에 와서 “이리 올라오라”에서부터 엉뚱한 길로 빠져버린다. 무천년주의자들이나 후천년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기에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전천년주의자들 중에서도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고 믿는 자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필자는 이미 <휴거와 재림>(말씀보존학회, 1991)에서 “왜 교회가 환란을 통과해야 하는가?”라는 제목 하에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아홉 가지 근거를 제시한 바 있다. 교회가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음 사항에 답변해 보기 바란다.

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2. 데살로니가전서 4:13-17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3. 교회가 지상에서 환란을 겪고 있다면 공중에서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어린 양의 혼인식에는 누가 참석하는가?

4. 교회가 7년간의 환란을 겪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도둑같이 오시며 우리 성도들이 눈깜짝 할 순간에 변모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5. 거듭난 성도들이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가?(롬5:8,9, 살전5:9, 계3:10)

6. “야곱의 고난”(Jacob's Trou- ble, 렘30:7)은 적그리스도의 치하에서 메시야를 거부한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에 대하여 받는 심판인데 그 심판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7. 다니엘의 70째 주에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부분도 지상에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는가?

8.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훗날 겪어야 할 환란을 가르치신 것인데 그것을 교회에게 주시는 교리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9. 우리는 지금 환란을 기다리고 있는가,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미 잘못된 지식으로 오염된 많은 사람들은 당신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린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렇다. 진리는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누군가 한 사람이나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옳다면 그와 상이한 해답은 틀린 것이다. 절대 진리는 성경이 증명하는 것이기에 성경적 근거로 설명되어야 하고 그 설명으로 납득이 되었으면 자기 고집을 버려야 한다.

거짓 지식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의 지식은 그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자인 조지 레드에게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학자들이 정립해 놓은 신학이론이 틀렸으면 자기도 함께 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이 남의 지식을 붙드는 일종의 부정행위인 것이다. 성경을 믿지 않고 학자를 믿으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딤후2:15).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고 믿게 된 것은 계시록 4:1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로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 또 내가 즉시 영 안에 있게 되었는데, 보라, 하늘에 한 보좌가 놓여 있고 한 분이 그 보좌에 앉으셨는데』(계4:1,2).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물론 이것은 사도 요한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여기에 언급된 일을 단순히 요한이 휴거된 것으로 보는 데 문제가 있다.

2. 요한은 들림 받아서 환란기간에 일어난 일들을 목격했다. 환란은 그때부터 적어도 1900년 이후에 있을 일이다. 계시록은 요한이 들림 받아 앞으로 있을 환란기간으로 옮겨져서 과거를 돌아보며 교회시대를 기록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천년왕국을 기록한 책이다.

요한이 4:1에서 들림받고 난 후 19장까지 교회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는데 교회가 환란에서 겪는 고난들이 왜 언급되지 않는 것일까? 계시록에는 환란이 4번 언급된다. 5장과 6장에서는 일곱 인으로, 8-11장에서는 일곱 나팔로, 12장-14장에서는 적그리스도의 활동으로, 15장-19장에서는 일곱 호리병으로 같은 환란이 4번 언급되었다. 환란은 그만큼 심각하고 그 고통 또한 극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중요한 일을 4번 반복하는 예는 사복음서를 들 수 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네 사람의 사도들이 각각 다룬 것이다.

3. 교회가 지상에서 환란을 통과하고 있는데 교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A.D. 90년의 소아시아의 일곱 지역교회에 적용되고, 교리적으로는 환란 때의 지역교회에 적용되지만, 영적으로는 교회시대의 역사를 유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와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케아 교회(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배교한 교회)를 대조시켜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계시록은 20세기를 사는 라오디케아 교회 성도들만을 위해 기록되지 않았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통해 교회사의 시대적 유형을 제시했다. 16세기에 살았던 루터는 라오디케아 교회의 배교의 실상을 성경을 통해 알 수는 있었어도 오늘날처럼 성경을 버리고 성경적 믿음을 버린 에큐메니칼 교회인 것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때이고 두 번째는 19:11-14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실 때이다. 하늘이 열릴 때마다 음성과 나팔소리가 났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누군가를 부르시는 것이다. 계시록 4:1에서도 그랬고 데살로니가전서 4:15-18에서도 그것이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소리임이 상세히 알려졌다.

4. 계시록 4:2에서 요한이 즉시 영 안에 있게 되었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말이 계시록 1:10에도 나와 있는 것을 본다. 이 말은 거듭난 성도가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몸의 변형을 말한다. 타고난 몸이 영적인 몸으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고전15:44). 그리스도인이 휴거될 때에는 현재의 몸을 가지고 올라갈 수 없다. 빛의 속도는 초당 30만km인데, 빛의 속도보다 훨씬 빨리 올라가는 것이다. 제트 여객기의 속도가 시간당 9600km인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계산 방법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0에서 말한 현재의 우리의 몸은 “땅에 속한 몸” (terrestrial body)인데, 이 몸이 하늘에 속한 몸(celestial body)으로 바뀌는 것이다. 지금까지 휴거되었던 에녹 외에 엘리야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모두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올라가셨지만 성도들의 휴거는 눈깜짝할 순간에 하늘에 속한 몸으로 바뀌기에 우리가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하늘에 속한 몸에 피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고전15:50).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적어도 400-1000년 전에 예언된 48가지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그 확률은 10의 157승분의 1이 된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에 빠뜨린 반지 한 개를 빈 낚시를 드리워 한 번에 건져내는 것보다 더 정확한 확률이다. 휴거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은 그 성취율이 그보다 훨씬 큰 것이다(10의 900승분의 1).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책일 뿐이다.

『성령 안에 있게 되었는데』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51-52과 비교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몸이 휴거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 할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5. “이리로 올라오라.” 했을 때 요한이 올라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또 이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이요, 원칙이다.

“요한”이란 이름은 “사랑받는 자”란 뜻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형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이다. 마치 이브가 한 남자의 아내임이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신부인 것과 같다. 아담은 아내를 얻기 위해서 옆구리를 열어야 했다. 즉 죽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얻기 위해 옆구리를 찔리셨고(요19:34) 죽으셔야 했다. 이브도 아담의 몸의 일부이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다.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의 살이다(엡5:30).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엡5: 25).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으나(요1: 31)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주님을 배반할 자가 누구인가를 물을 때에도 베드로는 요한에게 머리를 끄덕여 누구인가를 묻게 했다. 다른 제자들은 『주여, 그가 내니이까?』라고 물었지만(마26:22)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주여, 그가 누구니이까?』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요13:24,25). 요한은 자신이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할 만큼 주님을 사랑했다.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만큼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고 요한은 교회가 나오게 된 자리인 주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것이다.

또 요한복음 21:22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거취에 관하여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한들』이란 표현을 쓰셨다. 이 말은 주님이 요한을 성령 안에 붙들어 1900년의 기간을 통과하여 환란기간으로 옮겨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여주심을 의미한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님은 요한이 죽기 전에 오신 것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하고,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도 요한복음 14:3의 처소를 사람의 영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해서 앞으로 있을 재림에 관한 구절을 오순절 사건으로 해석해 버렸다. 이것이 무천년․후천년주의자들의 성경 실력이다.

요한은 A.D. 90년에 “성령 안에” 붙들려 “주의 날”에(주의 날을 일요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착각이다.) 주님의 재림을 보고 그 사실을 계시록에 기록한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인 교회의 유형이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것은 요한이 교회의 유형으로서 휴거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계시록 19장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교회가 지상에 없기 때문에 일곱 가지 재앙이 4번이나 반복되었지만 교회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부분휴거설(승리한 성도는 3년 반의 대환란 전에 휴거되고 실패한 성도는 환란 후에 휴거됨)이 대단히 많이 퍼져 있는데, 이것은 계시록 4:1의 시점을 휴거 대신에 승천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주장이며, 환란 끝부분에 있을 환란성도의 휴거를 몰랐기 때문에 나온 오류이다.

필자는 워치만 니 형제를 존경하며 그 분이 쓴 많은 책들로 영적 깨우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 형제도 계시록 4장을 교회의 휴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훌륭한 저서들에 흠집을 내었다. 그는 계시록 5:6의 도살당하였던 어린 양을 잘못된 헬라어 성경을 근거로 “최근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계시록 4장의 시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가 된다. 4장이 승천이 된다면 6장의 흰 말 탄 사람은 당연히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워치만 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박윤선 주석을 비롯하여 많은 주석서들이 틀린 부분이다.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해석해 놓은 것이다. 성경의 용어와 시제가 한 곳 틀리면 신학과 교리는 엉망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2,200 단어가 삭제되고 30,000여 군데가 오역된 <개역한글판성경>이 만들어 놓은 교리적 오류를 짐작이나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그 성경이 만들어낸 오류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표현은 세 번 나온다(계4:1; 11:12, 잠25:7). 잠언 25:7은 구약성도의 휴거이며, 계시록 4:1은 신약교회의 휴거이고, 계시록 11:12은 환란성도의 휴거이다. 환란성도의 휴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지금까지 라킨(C. Larkin), 펨버(Pember), 럭크만(Ruckman) 뿐이다. 스코필드(Scofield), 게버라인(Gaebelein), 펫팅겔(Pettingill), 아이언사이드(Ironside)도 알지 못했다. 우리 나라 신학자 중에 환란 성도의 휴거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환란성도의 휴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제 26호, ’94.5 참조)

하나님의 사역은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의 지식을 전달하는 일인데, 가짜 일꾼들이 뿌려놓은 쓰레기까지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지금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되고 있다.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사역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사역은 이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알고 가르치는 일꾼들이 나와야지 모르면서 가르치는 거짓 일꾼들이 나와서는 안 된다.

성경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책이다. 같은 진리의 영이 내주하시어 역사하시는데 왜 각기 틀린 지식을 갖는 것일까?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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